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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한 장면. JTBC 제공“아는 문제도 의심하고 또 의심해.”
“인생에서 중요한 건 우정·의리가 아니야. 니들 위치야.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라고. 밑바닥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정상에 있으면 누리는 거야.”
상류층의 피튀기는 입시전쟁을 다룬 화제의 드라마 JTBC <스카이캐슬>(2018)의 명대사죠. 드라마 속 아이들은 뒤주 같은 책상에 갇혀 문제집을 풀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기 위해 친구를 짓밟습니다. 입시공화국 한국의 단면을 날카롭게 풍자한 내용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학 간판을 향한 과도한 집착,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40년 전 11월12일 경향신문에는 <대학생 재수 급증, 넓어진 대학문…일류대를 노린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1980년 11월12일 경향신문이 기사의 주인공은 ‘대학생 재수생’들입니다. 대학생이지만 다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는 이들을 반수생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스카이캐슬>의 고교생들과는 처지가 조금 다르지만, 이른바 ‘더 높은 대학’을 가려고 애쓰는 모습은 닮았습니다. 기사는 대학입학예비고사(11월20일)를 앞두고 이들을 조명했습니다.
반수생이 부쩍 늘어난 건 이듬해(1981년)부터 대학 입학정원이 대폭 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집권세력인 신군부는 대학 입학정원을 역사상 최대로 늘렸습니다. 기사는 학교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세칭 일류대학의 정원이 지난해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고, 그동안 장기 휴강 등으로 일류대학에 다시 시험을 치를 수 있을 만큼 집에서 충분히 공부할 기회를 가진 1~2학년생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대학 문이 넓어지자 전문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휴학생이 늘었습니다. K대의 경우 2학기 휴학자는 704명으로 직전 해 597명보다 100여명이 늘었답니다. 그 중 1학년이 311명으로 절반 정도였습니다. 같은 기간 P대 휴학생은 100명에서 224명, M대는 109명에서 152명, D대는 280명에서 468명으로 늘었죠. 학교에서 사라진 학생들은 학원이 흡수했습니다. 학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J학원, T학원 등 유명 단과학원의 수강생 가운데 30%가 대학생이었다고 하네요. 주택가 독서실로 반수를 노리는 대학생들로 초만원을 이뤘답니다.
1992년 노량진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반수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스무 살 강모군은 지방의 K대학 경영학과에 휴학계를 내고 친구들과 함께 상경, 종합학원에 등록했습니다. “2학년까지 다니는데 쓴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아깝긴 하죠. 그런데 일류대학에 들어가면 그만한 것쯤은 보상되지 않겠어요? 학교에서 가끔 연락이 오면 해명하느라 애를 먹기도 해요.” 반대로 대학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강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학생이 없으니, 분위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겠죠. “학과 정원 30명 중에 10명이 휴학하거나 자퇴한데다가 요즘은 출석률마저 나쁩니다. 강의가 제대로 안 될 때가 많아요.” 한 대학 영문과 조교 김모씨의 말입니다.
40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입시 열풍은 진정됐을까요? 통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난해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32만1000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등교일수가 적었던 만큼, 반수생이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지난 7월 교육평가기관인 유웨이가 20학번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더니, 46.5%가 반수를 할 생각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상민 기자하지만 입시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980년 기사에 소개된 이모군은 반수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등학교 때 일류대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학교에서 이 계열(N계열)을 지원하게 했다”며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이번에 자연계열에 재응시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습니다. 학생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어른들과 사회에 더 큰 책임이 있는 건 아닐까요. 더 좋은 간판을 차지하면 세상은 ‘수고했다’ 할까요, 다음 목표를 정해줄까요. 기사가 나가고 30년 뒤인 2010년 어느 날, 대학생 김예슬씨는 대학을 그만두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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