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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도박단 신고하려다 호주머니에 마약
기다렸다는 듯 경찰 출동·판사는 도우미
사채왕 구속되면서 누명 벗고 명예회복
재심 선고로 18년 만에 무죄 "법이 참…"
정의의 여신상. 게티이미지뱅크“내가 그렇게 당하고 보니 법을 불신해 왔는데, 그래도 작게나마 정의가 살아있단 생각이 듭니다.”
18년 전 ‘명동 사채왕’ 일당의 사건 조작 탓에 마약 범죄자로 몰렸던 사업가 신모(61)씨가 17일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었다. 그는 자신을 속인 사기도박단을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오히려 도박단의 덫에 걸려서 억울한 옥살이까지 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 법원의 잘못이 5년에 걸친 법정 싸움 끝에 비로소 바로잡히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9단독 정종건 판사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향정)·폭행 등 혐의로 2002년 6월 유죄 판결을 받은 신씨의 재심 재판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再審)은 확정된 유죄판결에 중대한 흠이 발견된 경우, 피고인을 구제하기 위해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제도다.
신씨는 당시 ‘사채왕’ 최진호(66·수감 중)씨 일당이 놓은 마약 덫에 걸렸다. 2001년 12월 신씨는 서울 방배동의 한 다방을 찾았다. 사기 도박단에 속아 5억여원을 잃은 그가 경찰에 신고를 하려 하자, 도박단이 “돈을 일부 돌려주겠다”면서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정작 ‘약속한 돈’은 없었고, 도박단 일원이 다짜고짜 시비를 걸면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다방에 앉아 있던 여성 정모(70)씨가 싸움을 말리는 척하면서, 신씨 호주머니에 필로폰 0.3g이 든 비닐봉투를 몰래 집어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들이닥친 경찰은 신씨 해명도 듣지 않고 긴급체포했고, 그는 3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됐다. 마약사범으로 몰린 것도 억울한데, 신씨는 폭행 혐의로도 기소됐다. 법원은 이듬해 6월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고, 낙담한 신씨가 항소를 포기하면서 판결은 확정됐다.
그런데 7년 뒤 반전이 벌어졌다. 최씨와 돈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정씨가 검찰에서 “신씨에게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도박단이 최씨에게 1억원을 주고 꾸민 사기극”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정씨는 “최씨 지시에 따라 신씨의 바지 주머니에 필로폰을 몰래 넣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다방엔 최씨도 있었다고 밝혔다.
마약 범죄자로 몰려 수감생활을 한 사업가 신모씨가 지난 2018년 9월 27일 대법원에 조속한 재심 개시 결정을 촉구하며 제출한 탄원서 일부. 신씨 제공그러나 최씨는 마약사건으로 구속은커녕, 2010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그는 돈으로 증인은 물론, 현직 판사의 양심까지 매수했다. 증인들에겐 진술 번복을 회유했고, 당시 신임법관 연수를 받던 최민호 전 판사에게 돈을 건네고는 수사 상황을 전달받기도 했다. 신씨로선 희망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2012년 최씨가 13개 죄목으로 구속 기소되고 2015년 최 전 판사도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되면서 신씨에게 명예회복을 위한 길이 마련됐다.
재심 과정은 험난했다. 청구 이듬해인 2017년 1월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나왔음에도, 검찰의 항고·재항고로 2년이 흘러 지난해 1월에야 비로소 정식 재판이 열렸다. 핵심 증인인 최씨가 수차례 소환에도 갖은 이유를 대며 법정에 나오지 않아, 그를 증인으로 세우는 데에만 2년 가까이 걸렸다는 게 신씨 측 설명이다. 법정에 선 최씨는 진술을 거부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관련자들 진술이 세부적 측면에선 다르지만, 신씨 주머니에 마약 봉지를 몰래 넣었다는 핵심 취지는 일관된다”고 밝혔다. 폭행 혐의도 입증이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씨 일당이 경찰과 사전 모의를 했다는 신씨 측 주장에 대해서도 “단정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정황을 보면 최씨와 경찰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상당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씨 변호를 맡은 허윤 변호사는 “당시 신씨를 체포한 현직 경찰관과 최씨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소송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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